내마음의 풍경 :: 독자들의 수필 :: 할머니의 도시락 :: 지금이야 학교에서 단체로 급식을 해주기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락 먹는 풍경도 보기 힘들고, 부모들도 도시락 싸야 될 근심도 없겠지만, 우리 세대들이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때는 도시락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다녔기에 도시락을 쌀 일이 없었지만, 4학년이 되고 나니 도시락을 싸 간다는 기쁨에 마음이 들떴다. 4교시가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노란색 양철 도시락 뚜껑을 열면 교실 안은 이내 고소한 냄새들로 가득차곤 했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코끝을 자극하고 입안에 침을 고이게 만든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형과 누나, 그리고 나까지 3명의 도시락은 새벽 일찍 일을 나가시던 부모님 대신 할머니께서 싸주셨다. 흰 쌀 밥의 한 구석에 담긴 멸치볶음과 콩자반, 김치볶음이 주 메뉴였는데 시력이 안 좋으셔서 비뚤비뚤한 것이 모양은 볼품은 없었지만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 할머니께서는 늘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계셨다. 비 오는 날에는 김치전을 넉넉하게 부쳐주셔서 동네 친구들을 불러다 배부르게 먹게 하셨고, 봄날에는 나와 형에게 뒷산에 쑥을 뜯어 오게 해 구수한 쑥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뒷마당 항아리에 가득 담긴 직접 담그신 섞박지와 김치는 늘 우리 집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밥 한 그릇 이내 뚝딱할 정도로 할머니의 손맛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도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워 ‘원조 맛 집’, ‘할머니 손맛’ 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곳이 있으면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맛에 비길 곳은 없었다. 음식 하나하나에 가득 담긴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 그리고 어린 날의 추억까지 더해진 그때의 도시락이 참으로 그립다. 내마음의 풍경 :: 독자들의 수필 :: 동요가 이상해 :: 작년부터 부모님은 ‘손녀 육아’를 시작하셨다. 맞벌이 하는 남동생 내외를 대신해 부모님이 맡아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전에는 평일이면 늘 이런 저런 모임이다 운동이다 분주하셨던 부모님의 일상은 이제 꼼짝없이 손녀에 맞춰졌다. 일주일에 5일만 보는것이니 뭐 그리 힘들겠냐며, 우리 형제들을 키워온 경험에 비하면 손녀 하나 돌보는 거야 수월한 일이라며, 아들 며느리에게는 걱정 말고 일하라고 격려도 하셨지만 처음 6개월 동안은 밤낮이 바뀌어 두분 모두 수척해지기도 하셨다. 이제 아장아장 걷고 의사표현도 곧 잘하는 조카는, 춤도 잘 추고 애교도 많아 가족 모두의 기쁨이다. 언제부턴가 평일에 전화를 드리면 수화기 너머로 늘 노랫소리가 들렸다. “엄마, 무슨 소리예요?” “너거 아부지가 동요 불러 준다고 안카나.” “아버지가요? 동요를?” 어릴 적 아버지는 중동에서 수년을 일하셨다. 그래서 늘 부재중이었고, 돌아와서도 바쁘셔서 자식들에게는 살가운 시간 한번 내주신 적이 없던 근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였다. 그런 분이 손녀에게 동요를 불러주신다니... 그 따뜻하고 흐뭇한 광경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을 맞아 부모님 댁에 갔다. ‘고모, 고모’ 부르며 안기는 조카가 예뻐서 한참 놀아주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시더니 “얘가 노래를 아주 잘해. 꼭 가수 같아. 부르면 부르는 대로 다 따라한다.” “벌써 노래를 불러요? 정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카는 서툰 발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있구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놀지요...” 그런데 가사도 조금씩 틀리고 음은 더욱 이상했다. 우리 아버지는 자타공인 음치, 박치다. 그런 아버지의 노래를 듣고 따라하다 보니 조카가 부르는 노래는 조금씩 음정이며 박자가 묘하게 어긋났다. 조카의 노래를 들으며 결국 우리 식구 모두는 한바탕 웃고 말았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동요 음정과 박자가 조금씩 다르다 해도 아무렴 어떤가. 손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손녀를 키우며 나날이 마음이 젊어지고 있다고 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어색한 율동까지 곁들여 동요를 가르치고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