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여행기

벚꽃터널 걸으며 마음은 만발하다

글 · 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봄이면 하동 화개에 벚꽃이 핀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은 아득하게 피어 꽃비를 뿌린다. 악양 들판 보리밭은 찬란한 봄햇살을 받으며 키를 쑥쑥 키운다. 강마을 사람들은 강으로 나가 재첩 잡이를 시작하고, 비탈마다 자리한 찻집에선 밤을 밝혀 차를 덖는다. 봄, 하동으로 가볼 일, 가서 만발한 봄을 만나고 겪어볼 일.

찬란한 봄마을, 화개

하동의 봄은 3월, 매화가 피면서 시작한다. 봄볕이 대기의 온도를 높이면 섬진강변에 자리한 매화나무들은 허공 중으로 꽃들을 툭 툭 피운다. 매화가 피면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 목련과 벚꽃이 꽃봉오리를 열어젖힌다. 악양 들판의 보리밭도 키를 더해 4월 초면 복숭아뼈를, 중순이면 무릎을 덮을 정도로 자란다. 하동 봄 풍경의 절정은 이맘 때.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10리길에 벚꽃길이 환하게 열릴 때다. 하얀 눈처럼, 솜뭉치처럼 풍성하게 피어난 벚꽃은 깊고 깊은 터널을 이룬다. 바람이라도 불면 비처럼 꽃잎이 쏟아져 내린다. 꽃비를 맞으며 한 시간 정도 걷다보면 쌍계사에 닿는다. 쌍계사는 범패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쌍계사 팔영루에서 범패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팔영루라는 이름 역시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범패를 작곡해서 붙여진 것이다.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의 명령에 따라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봄날 하동 여행에서 햇차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 안개가 많고 일교차가 큰 하동은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하동차 대부분은 수제차다. 손으로 직접 따고 덖는다.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차밭도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가지런히 줄을 맞춘 녹차밭과는 다르다. 화개장터 입구에서부터 쌍계사를 지나 신흥까지,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따라 듬성듬성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길이가 장장 12km에 이른다고 한다. 쌍계사 주변으로 제다업체와 차를 덖는 찻집이 가득하다. 첫차가 나오는 4월 초부터 6월 초까지 차를 덖는다. 집집마다 제다법이 다르고 차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고집쟁이들이 내놓은 은은한 햇차 한 잔을 즐기다 보면 봄이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하동의 차를 맛보고 다원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은 쌍계사에서 칠불암으로 가는 길에 자리한 관향다원이다. 차를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다원이다. 황토 바닥과 수묵화가 걸린 벽이 멋스럽다. 벚꽃이 꽂힌 찻상도 운치 있다. 주인이 직접 녹차잎을 따고 말리고 덖은 차를 내준다. 차를 시키면 함께 나오는 홍시도 맛깔스럽다.

고소산성에서 본 섬진강

'토지'의 뿌리, 악양과 평사리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면 평사리로 가보자.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박경리 선생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원고지 3만 1,200여 장을 촘촘히 써내려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생이 <토지>를 집필하는 동안 한 번도 평사리를 찾지 않았다는 것. 선생은 1960년대 말 어느 날 섬진강을 지나다가 악양 들을 보곤 <토지>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평사리에는 소설에 나오는 '최참판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3,000여 평 대지에 지어진 14동의 한옥은 조선시대 양반집을 그대로 재현했다. 윤씨부인과 서희가 기거했던 안채와 길상이를 비롯한 하인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최치수가 머물던 사랑채 등이 잘 정돈되어 있다. 최참판댁에서는 드넓은 평사리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소나무 한 쌍이 다정히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부부송이라 불린다. 악양들의 상징과도 같다. 하동포구에서 날아온 강바람이라도 보리밭을 지날 때면 들판은 연못에 파문이 일듯 출렁거린다. 최참판댁을 지나 고소산성으로 올라갈 수 있다. 60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원군인 위병의 섬진강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성이다. 성은 복원이 잘 되어 있다. 솔바람 부는 산성에 앉아 드넓은 악양 들판과 화개에서 하동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다.

찬란한 봄 햇빛 속으로 희고 붉은 꽃들이 폭죽이 터지듯 만발한다 악양 들판의 보리밭도 매일매일 키를 더해 4월 초면 복숭아뼈를 중순이면 무릎을 덮을 정도로 자란다

차 밭에 핀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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