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Ⅰ

당신의 무진은 어디입니까

조금 이른 가을, ‘무진’을 찾았다. 그곳에는 작가 김승옥이 만났을 자욱한 안개도, 시인 기형도가 보았을 음습한 기운도 없었다.
다만 휘청거리는 갈대의 속울음만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write • photograph 박은경(한국관광공사)

순천의 석양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 ‘무진(霧津)’. 작품에서 그곳은 짙은 안개가 수시로 들고나는 몽환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것도 순식간에 모든 것을 감추는, 설령 그것이 상처나 아픔일지라도 어렵지 않게 덮어주는 그런 안개 말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야 수백 리를 걸어서라도 가겠지만, 안타깝게도 무진은 대한민국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무진이 바로 김승옥 작가가 학창시절을 보낸 순천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무진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무진은 비밀 많은 장소로 종종 그려진다. 시인 기형도가 3박 4일간 남부지방을 여행하고 쓴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등장한 무진이 그러하고, 영화로도 큰 주목을 받았던 ‘도가니’의 배경이 된 무진이 그러하다.
하지만 순천은 무진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일탈과 위안의 무대로는 더없이 어울리지만, 기형도가 만났던 음습함이나 까탈스러움, 공지영이 가져다 붙인(실제 사건은 광주에서 일어났으나 소설에서는 무진으로 등장했다) 잔혹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순천만에 이르면 더욱 확실해진다. 여기에는 순천 출신의 작가 정채봉도 말을 보탠다.



순천만


순천에 가신다고요? 순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요? 바다가 아스라이 여인의 인조비단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는 순천만에 가보세요.
순수한 동심이 있는 우리고장 순천만이 그대의 발길에 위안을 주리라 믿습니다. 부디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광 두르소서.

- 정채봉 에세이 《눈을 감고 보는 길》 중



갈대숲
순천만자연생태공원


발길마다 위안이 되는 곳, 순천만

순천만은 빽빽한 갈대숲과 광활한 갯벌로 이뤄져 있다. 이 땅에서 갈대밭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순천만처럼 너르고 우아하며 매혹적인 곳은 드물다. 특히 갈대꽃 만발하는 늦가을이면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허연 솜털이 바람을 껴안고 춤이라도 추는 날에는 무쇠 같은 아버지의 무심함 쯤은 속절없이 무너뜨린다. 갈대밭 산책은 대대포구에서 시작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를 지나 무진교를 건너면 무성한 갈대숲 가운데 탐방로(1.2km, 왕복 30~40분)가 이어진다. 어른 키만한 갈대를 지그재그로 가르는 길은 어쩐지 쓸쓸하다. 발길마다 바람에 시달리며 연신 머리를 휘청거리는 춤사위는 애처롭고, 머리채 다 닳도록 흔드는 몸짓은 안타깝다. 그럼에도 갈대는 슬픔보다는 위안이다. 위로이며 희망이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몸을 굽혀 거센 고난을 거뜬하게 이겨낸다. 그리고 그렇게 무사히 늦가을을 위한 예복을 차려입는다. 아래로 드러난 갯벌에서는 짱뚱어와 농게가 분주하다. 아이들은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까지 쭉 빼고는 구경에 여념이 없다. 때 만난 왜가리 역시 먹잇감 물색으로 눈이 바쁘다. 이 역시 수천 년을 버텨온 갈대의 외로운 사투 덕분이다.

한발 물러나 장대한 갈대밭을 만나기 위해 용산전망대(2.3km, 왕복 1시간 30분)로 향한다. 갈대숲 탐방로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대략 1km만 더 걸으면 전망대에 닿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밌는 전설이 하나 숨어 있다. 하늘로 오르던 용이 순천만의 빼어난 풍광에 놀라 여의주를 놓치면서 이곳에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다. 그때부터 용은 스스로 산이 되어 사람들에게 순천만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단다.



갈대숲 탐방로


용의 등을 타고 전망대에 도착하면 아래로 펼쳐진 대자연에 숨이 막힌다. 동그랗게 원형 군락을 이룬 갈대밭과 S자로 쭉 빠진 물길, 그리고 유려한 파형을 그리며 미끄러지는 고깃배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가장 벅찬 풍경을 내어주는 때는 해 질 무렵. 붉은 노을이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어르며 하나로 이어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아마 용이 여의주를 떨어뜨린 시간도 이맘때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할 만큼 자꾸만 입이 벌어진다.



짱뚱어


반면 순천만의 속살을 제대로 느끼는 데는 생태체험선이 제격이다. S자 물길을 따라 순천만 앞바다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왕복 6km 코스로 35분 정도가 걸린다. 배는 최소한의 소음만 내며 느리게 앞으로 나아간다. 해설사의 설명도 확성기가 아니라 한 사람에 하나씩 지급되는 수신기로 이뤄진다.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새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새들도 배의 움직임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무척 여유롭다. 입이 주걱처럼 생긴 저어새는 물속에 부리를 넣고 휘휘 젓느라 여념이 없고, 부리가 기다란 도요새는 2m아래까지 숨어 들어간 갯지렁이를 찾느라 정신이 팔렸다.



생태체험선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주소 전남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문의 061-749-6052   www.suncheonbay.go.kr
관람시간 8시~일몰 입장요금 어른 8000원, 청소년 6000원, 어린이 4000원 ※순천만국가정원 입장 포함
이용요금 생태체험선 어른 7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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