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인터뷰 :: 골든벨 소녀, 꿈 전도사가 되다 꿈멘토 김수영 ::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직업을 세다 보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여행가, 작가, 사업가, 마케터, 강연가, 블로거, 번역가,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요가 강사, 인도 발리우드 영화배우, 예술가, 기획자.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의 직업은 ‘꿈의 파노라마’ 대표다. 꿈쟁이요, 꿈멘토다.

가출 소녀, 골든벨을 울리다

실업계 최초의 골든벨 소녀. 1999년 김수영은 그렇게 세상에 데뷔했다. 여수정보과학고 3학년 이던 김수영은 이정현의 <와>에 맞춰 미친 듯이 댄스 퍼레이드를 선보였다. 그의 댄스에 도전장을 내민 아나운서에게 “왕자를 불렀더니 마당쇠가 나왔네!”라며 좌중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유머센스도 있었다. 배포두둑하고영리한 소녀.그러나 김수영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소녀는 이유 없는 따돌림을 오래겪었다. 원체 무대 체질이었던 수영은 초등학교 5학년 소풍 날 당시 TV프로그램 <민지의 일기>를 패러디해 학급 스타가 됐다.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하던 길 갑자기 나타난 덩치 큰 아이에게 “잘난 척 하지마!” 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 날 이후, 수영은 고독과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불행히도 부친의 사업도 기울었다. 어머니는 폐지 수거부터 가사도우미 일까지 닥치는 대로 해 가며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는 실패의 고통을 잊으려는지 매일 술을 마셨다. ‘자살’이라는 두단어가 소녀의 머릿 속에 자리 잡았다. 바스콘셀레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속 제제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견뎌냈던 시절.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음을 되찾아갈 즈음, 친구 무리가 불량 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까진 애’로 찍혔으니 뭘 해봐도 구박만 받았다. 자꾸 화만 났다. 술담배에 손을 댔고 공부에는 손을 뗐다. 매일 등교해서는 매만 맞았다. 수영을 다독이는 대신 “제발 가출이라도 해라. 퇴학시켜 버리게”라고 말하는 어른들. “집도 학교도 지옥 같았어요. 결국 가출을 했고 친구집과 주유소를 전전하며 패싸움으로 하루를 보냈지요.”
가출 석달째인 어느 날 그의 귀에 “너에겐 괜찮은 미래가 있어”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서태지였다. “아직 우리는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차가운 눈물 을 닦고 컴백 홈” 충격적이었다. 그저 대중가요 노랫말일 뿐이더라도 소녀는 애타게 매달려 보고 싶었다. “어쩌면...달라질 수 있을지도 몰라” 노랫말을 동앗줄처럼 부여잡고 집에 돌아와 검정고시를 봤다. 이후 김수영의 인생은 KBS ‘도전골든벨’을 계기로 크게 바뀌게 된다. 얼마 후 여수 진입도로에 ‘여수정보과학고 골든벨 김수영, 연세대 인문계열 합격’이라는 현수막도 붙었다. 한때 “너를 포기한다”고 말했던 아버지는 “기적이...이뤄지기도 하는구나”라며 눈물 지었다.

스물다섯, 암선고를 받고 다시 써 본 꿈 리스트

스물다섯, 암선고를 받고 다시 써 본 꿈 리스트 미운오리새끼의 비상은 계속됐다. 연세대 졸업후 골드만삭스에 당당히 합격한 것. 50번의 낙방 끝에 거머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해피엔딩이었을까? 두근거림을 안고 받은 입사 신체검사. 어쩐지 감이 안 좋아 한번 더 정밀검사를 받기로 했다. 암이라고 했다. “잠시 치과에 좀 다녀올게요.” 회사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수술을 받았다. 마취가 풀리자 제대로 쉬지도 않고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이후 그녀의 인생은 다시 한번 방향을 틀게 됐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된 거죠. 먼 미래의 성공만 바라본다 해도, 정작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매일 행복해야겠다!’ 차근차근 꿈을 쓰기 시작했다. 무모해 보이더라도 우선 적고 봤다.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 장학재단 만들어 100개국 1만 명 이상에게 교육의 기회 주기, 열기구 타고 세계일주,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고독>같은 소설 쓰기, 죽은 뒤 전재산 기부하기...세어보니 73개였다. 대한민국에서 삶의 3분의 1을 살았다면, 다음 3분의 1은 전세계에서, 나머지 3분의 1은 가장 사랑하는 장소에서 살자는 게 1번 목록이었다. 입사 9개월차 김수영은 바로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 2005년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다시 취업을 시작했다. 백번이 넘는 도전 끝에 다국적기업인 로열 더취셀에 입사했다. 연 800만 달러의 매출을 책임지는 카테고리 매니저가 됐다.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책 쓰기’도 꿈 리스트 중 하나였다. 2010년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를 냈고, 30만 부가 팔렸다. 발간 후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 했다. 48번 꿈 ‘오프라 윈프리 토크쇼 같은 무대를 통해 감동 나누기’가 이뤄진 것. 그 사이 암이 완치됐다. 삶은 계속됐다. 지금도 꿈 목록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부모님 집 사드리기’는 2010년에 성공했다. 발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자는 엉뚱한 결심도 추진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리스트의 절반 이상을 이뤘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며 산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며 산다 인생은 둘로 나뉜다. 꿈을 향해 달릴 때와 꿈을 몰라 머물고만 있을 때. 한 번 꿈이 생기자 인생은 질주하기 시작했다. 2011년 김수영은 지구 반바퀴를 돌며 365명의 꿈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레바논 TV에서 아랍어 노래를 부르고 탈레반들과 꿈 인터뷰를 했다.
70여개국을 돌아본 후 그는 “우리나라처럼 꿈을 꾸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 좋은 나라는 드물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실천해 이제 그는 최고의 스타강사로 자리 잡았다. 오로지 자신이 실천한 것만을 사례로 삼아 청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그녀의 강연은 흔한 자기계발서와는 차별된다는 평이다. 꿈멘토 김수영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죠. 인생은 살아지는대로 사는 게 아니라, 매순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걸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십년 후 지금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를 늘 고민해요. 당장 힘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내면, 나중에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하게 될 거야’ 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럴 때는 분명 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며 산다

취재·글 _ 김은성   사진제공 _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