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풍경 :: 계란말이와 도시락 ::  김영자 :: 우리집 아이들은 내가 만든 ‘계란말이’를 아주 좋아한다. 밑반찬이 없을 때나 급히 밥상을 차려야할때 파와 당근을 곱게 썰어 후다닥 말아주면 밥 한그릇을 금새 비우곤 한다. 예전에는 모두 학교에 도시락을 싸 다녔다는 말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기 바쁘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구요? 와, 불편했겠다.” “그럼 어디서 먹었어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겨울에는 교실마다 난로를 피웠다. 3교시 쯤이 되면 선생님은 도시락 통을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주셨다. 양은 혹은 스텐레스통에 담아온 밥을 고루 뜨듯하게 데워주시려고 장갑을 끼고 수시로 위아래 다시 쌓기를 반복하다보면 점심시간엔 모두들 뜨끈한 밥을 먹을수 있었다. 반찬으로 싸온 김치에서 국물이 흘러 가방 한쪽이 젖기는 예사였고 빈 밥통마다 쩔그렁 거리는 수저 소리가 요란하도록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새벽이면 엄마의 도마질 소리가 아련히 들렸고 매일 아침 오늘은 무슨 반찬일까 설레며 눈을 뜨곤 했다. 직장생활을 하시는 바쁜 엄마에게 반찬투정을 한적은 없었지만, 딱 한번 이것 좀 싸달라 졸랐던 반찬이 바로 ‘계란말이’였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계란말이라는게 어떤건지 정확히 모르셨던것 같다. 친구의 반찬통에서 다진 파와 당근이 잘 섞여 촘촘하게 말린 정갈한 계란말이를 본 후, 나도 그렇게 예쁜 모양의 계란말이를 싸달라고 졸랐었다. 계란에 큼지막하게 다진 파를 풀고 넓적하게 전처럼 부쳐, 네모나게 썰어주신 반찬을 보며 알았다. 엄마는 계란말이를 보신 적이 없으셨다는 걸.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정말 제대로 된 계란말이를 맛볼 수 있었다. 계란과 김이 환상적으로 돌돌말린게 맛도 색감도 너무 좋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계란말이를 무척 좋아했었다. 지금도 도시락에 곱게 담겨있던 그 때의 계란말이를 생각하면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듬뿍 담겨 돌돌 말린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버린 우정을 생각하며 :: 송준용 :: 작년 시월 말경이었다. 밖에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실에 놓인 핸드폰에서 요란한 착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샤워를 계속했다. 흔히 걸려오는 전화겠거니 생각하면서.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다. 핸드폰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나의 단짝친구의 별세소식이었던 것이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그 길로 메시지에 적힌 그 병원 영안실을 찾았다. 친구는 벌써 저승 사람이 되어 나를 맞이했다. 친구의 영정 앞에 허리 굽혀 두 번 절하고 나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울고 또 울었지만 비통하고 침통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서로 같은 입장이니 퇴직하면 해외여행 한 번 함께 다녀오자고 했지만 그 약속마저 저버리고 친구는 갔다. 그 후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술이라도 한잔 마신 날이면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응답이 있을리 없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라는 소리만 반복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어찌 나 혼자뿐이겠는가 마는 친구를 잃는다는 것, 특히 나이 들어서 오래 쌓아왔던 우정을 잃는다는 것은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때 맺어진 우리들의 우정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군복무 시절엔 월남에 파병되어 몇 번의 죽을 고비도 함께 넘기지 않았던가.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딛은 것도 거의 같은 시기였다. 성격도 잘 맞아 도무지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여느 우정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스산하게 바람이 불어오니 늘그막에 잃어버린 그 친구가 무척이나 생각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