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국민연금이 없던 시절 나는 공무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공무원들은 별다른 계획
없이 직장생활만 열심히 하면 퇴직해서도 연금을 받아가며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선진국 노인들은 완비된 연금제도와 복지제도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일하는 동안 내내 연금 등 각종 사회보험과 세금으로 소득의 50% 가까이 부담하고 노후엔 편안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긴다고 했다. 뜻밖에 사회주의 국가에도 연금제도가 갖춰져 있어 노후에 대한 걱정은
그리 안하고 산다는 것도 알았다. 91년, 근무하던 기아자동차에서 모범사원으로 연수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중국 노인들은 국가의 연금제도로 젊은 시절에 받던 급여의 70%정도를 받아 생활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생기면서부터 10년 이상 맺은 국민연금과 나와의 인연은 IMF사태로 끝나고 말았다. 회사
부도로 본의 아니게 퇴직하면서 그동안 납부한 국민연금을 반환일시금으로 받아 버린 것이다. 나에겐
거의 유일한 노후대책이었지만 같이 퇴직한 대부분의 동료들이 반환일시금을 받아 당시 높은 금리를 준다는
은행에 넣는 상황에서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원했던 국민연금이었지만
눈앞의 조그만 이익에 내 노후대비책이 뿌리째 뽑히고 만 것이다.
IMF경제위기가 끝나가고 금리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국민연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배운 기술이 있어 몇몇 중소업체를 드나들며 돈벌이를 했지만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반환일시금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게 국민연금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새로 다니게 된 회사에서 동료직원으로부터
일단 받은 반환일시금도 한꺼번에 다시 내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아내와
난 이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하나 걱정이 앞섰다. 상해보험 같은 것도 나이가 들어서 가입하려면 보험료가
비싸다는 걸 알고 있었고, 불과 2년 밖에 안 남은 60세부터 평생 주는 연금인데 5,000만원은
족히 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낸 돈은 반환일시금으로 찾은 금액에다 약간의 이자만 더해 1,300만원 남짓에 불과했다.
물론 목돈을 한꺼번에 내지 못하고 네 번에 나눠 냈다. 그리곤 내가 이전에 가입했던 기간이 고스란히
살아나 몇 군데 중소업체에 다니면서 보험료를 낸 기간까지 모두 15년이 넘었다.
지난 6월 나는 처음으로 26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았다. 내가 국민연금에 낸 돈으로 일반 연금보험
같은 걸 들었다면 절대 받을 수 없는 금액이고 은행이자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내도 무척 좋아한다.
앞으로 평생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이보다 좋을 순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예전의 직장동료들도 줄줄이 나처럼 받은 돈을 반납하고 연금을 받고 있다. 모두들“한창 바쁘게 일할
때야 언제까지 안 늙을 것 같고 그래서 연금이 그다지 크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이젠 적은 돈이지만
연금을 받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옷차림이나 행동에서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 같다는 말도 한다.
큰아들과 딸아이가 결혼을 해서 출가하고 지금은 어머니와 아내, 막내아들 이렇게 넷이 한집에 산다.
종손으로 제사도 많고 생활비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우리식구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사는 데는 국민연금이
꽤 도움이 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당숙께서도 연금을 받기 전엔 용돈이나 생활비 문제로 자녀와 좀 껄끄러웠다고 하셨다.
연금을 받으면서 달라진 건 크게 경제적인 도움이 되었다기보다 자신의 태도가 당당해진 것이란다.
늙어서도 매달 일정한 돈이 손에 쥐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