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 그것도 5백 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꺼내려니 고리타분하게 비칠까 저어하여 모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흉내를 내보았다. 한국음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은데도 아둔한 필자가 괜한 사설을 떤 것이기를 소망한다.
정답처럼 세종은 절대음감을 지녔다. 더불어 음악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제례의식은 조선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이때 쓰는 음악인 아악은 문자보(文字譜)인 율자보(律字譜)로 기보(記譜)해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의 음악이 아니고 중국음악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평소에 들었으므로 제사에 연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니 어찌된 일이냐.”
세종은 제사 아악이 중국 아악으로 편제된 것을 보고 못마땅해 했다.
“우리 음악이 비록 최선은 못 된다고 하나 중국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라면서 직접 아악을 작곡하였다. 그것이 <정대업><보태평>으로 세조 때부터 종묘 제사음악으로 쓰였다.
1114년 송나라 때 고려로 들어와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동안 제사음악으로 쓰인 아악은 규칙적인 박자로 연주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악보가 아주 단순해도 됐다. 마치 공책에 메모하듯이 적었다. 그런데, <정대업> <보태평>은 불규칙한 리듬 꼴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 문자보로는 이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자작곡을 기보하려고 1445년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였다.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리듬 꼴을 기보할 수 있는 악보이다. 추측하건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왕이 직접 만든 악보일 듯하다. 정간보는 우물 정(井)모양의 간(間)을 그려, 그 간(間)안에 음의 높이를 알 수 있는 기보법(율자보, 궁상자보, 공척보)을 적어 넣어 음고(音高)를 표시했다. 또한 정간의 어느 위치에 적어 넣느냐에 따라 음가(音價)를 정할 수 있다.
세종은 이 방법으로 다른 악곡들도 비교적 정확한 리듬 꼴을 표기할 수 있었다. <세종실록 악보>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악보인데, 역시 정간보로 기보되어 있다. 세종이 작곡한 <정대업><보태평>과 당시에 새로 작곡된 <봉래의><만전춘><여민락><치화평> 등 향악곡이 실려 있다.
정간보의 위대한 창안 이면에는 세종의 절대음감과 더불어 정치적인 이유가 숨겨 있다. 과거 3S (Sports, Sex, Screen)를 통치수단으로 삼던 독재정권시절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세종에게 음악은 통치수단이었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적잖을 것이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단 세종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나라, 송나라 등도 음악을 통치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심지어 송나라는 음악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조선의 통치 이념이 유교라는 사실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이 이념을 가장 자연스럽게 실현할 수 방법이었다.
‘유교적 음악관을 예악(禮樂)이라고 한다. 예악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禮는 공경(恭敬)하는 것으로 사람이 사는 당연한 법칙이고, 樂은 중정화평(中正和平)으로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화(和)하게 되는 것이다. 禮는 서열을 짓는 것이므로 사람의 분수를 구별하게 하고, 樂은 조화(和)하는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을 합하게 한다.’ (<禮記> 중에서)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은 4대 임금인 세종 대에 이르러 개국공신 세력과 고려 유민들의 저항이 약해지면서 정치적으로 안정화 된다. 따라서 세종은 사회, 문화,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폭 넓게 나라의 기틀을 다질 여유가 생겼다.
더불어 통치 이념인 유교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고,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 음악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종은 음악을 예악으로 뿐만 아니라 건국 초부터 세워진 정책을 후대 왕들에게 전하고, 정권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알리는데 십분 활용하였다. <세종실록 악보>에 실린 곡들은 대부분 이런 정치성을 띠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는 5백 년 동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간보는 세종의 음악적 재능과 정치적인 목적이 어울려 빚어낸 한국음악의 대표적인 명품이다. 역사적 가치 이상으로 실용성도 뛰어나 한국음악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악보로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한국음악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