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시대의 기억을 품은 마을

지금은 도보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는 소제동이지만, 예전에는 ‘소제호(蘇堤湖)’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소제호는 중국 쑤저우(蘇州) 지방의 호수와 견줄 만큼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소제동의 이름은 바로 이 소제호에서 유래했다. 커다란 호수가 품었던 아름다운 마을이 크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904년 대전역이 생기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역 뒤편에 있던 이 작은 시골 마을에는 일본 철도공사 종사자들과 기술자들이 머무는 철도 관사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1920년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관사들은 1927년 소제호를 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늘어났고, 1939년대까지 약 40여 채의 철도관사가 밀집되면서 하나의 마을을 형성했다. 바로 지금의 소제동이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국토의 곳곳에 철도관사촌이 형성되었지만, 소제동만큼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곳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당시만 해도 대전역을 중심으로 북관사촌, 남관사촌, 동관사촌 등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전쟁을 겪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 그 모습이 사라지고 유일하게 소제동 관사촌만 여전히 남아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40여 채의 가옥이 남아 있는데, 이래 봬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관사촌 중 전국에서 가장 큰규모를 자랑한다.
대전역에 도착해 동광장 방면으로 나와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제동에 들어선다. 어느 곳으로 걸음을 옮겨야할지 망설여진다면, 역 광장에서 보이는 대전전통나래관을 이정표 삼아도 좋다. 6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오르면, 소제동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함께 낡아간 형상이 손때가 가득 묻은 옛 앨범을 닮은 듯 보인다. 회색 지붕 사이사이로 보이는 이질적인 건물들이 뉴트로의 옷을 입고 새롭게 단장한 공간들일 것이다. 소제동의 풍경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골목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선다.

골목과 골목 사이의 일상

그럴듯한 풍경을 상상하며 소제동을 찾았다면, 어쩌면 실망감이 먼저 몰려올지 모른다. 소제동의 첫인상은 낡은 공간들이 서로 누벼져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보 같기 때문이다. 오래 보아야 아름다운 것은 골목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채 정비가 되지 않은 길은 두 사람이 어깨를 붙이고 걸어야 할 만큼 좁고, 굽이져 있다. 그곳에 발을 딛고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풍경들이 시선을 잡아맨다. 기우뚱하니 열려있는 대문과 마당에 자리 잡은 소담한 화단, 담벼락 위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깨진 유리병. 흙담에 적혀있는 낙서들까지. 이제는 애써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풍경이 이곳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처음 소제동이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대전에서 제일가는 부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약 1km 떨어진 선화동(현 중앙로)에 충남도청(현 근현대사전시관)이 들어선 후 도시의 중심가는 그곳으로 옮겨갔다. 소제동은 철도로 인해 도심과 단절되게 되었고, 서서히 쇠락하며 옛 영광을 잃게 된 것이다. 철도공사로 시작된 마을이 철도로 인해 그 명성을 잃고 쇠퇴한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니, 쓸쓸한 풍경 속에 애처로움마저 배어난다.
골목을 걷다 보니 몇 해 전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떠오른다. 드라마 속 골목처럼 이곳에는 반가운 가게들이 곳곳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살짝 열려있는 문 틈새로 쌀집의 내부를 훔쳐보기도 하고, 자물쇠가 걸린 이용원의 대문에서는 직접 손글씨로 적은 ‘전화주세요’ 메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대창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이용원은 한 자리에서만 6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세탁물을 처마 밑에 진열해놓은 세탁소, 작은 동네 슈퍼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재생과 보존의 이념이 서로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일상을 꾸리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관사 16호 그리고 소제창작촌

소제동의 건물은 있는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켜켜이 시간을 쌓으며 적당히 낡고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버텨온 모습에는 그 시절 격동의 시기를 살아내야 했던 윗세대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제동의 건물을 고스란히 하나의 작품으로, 또 전시공간으로 꾸며 올해 새롭게 개관한 곳이 있다. 갤러리 ‘관사 16호’. 1940년대와 1980년대의 공간 속에 가상현실 세계를 끌어들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색다른 시공간을 탄생시켰다.
문을 열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선다. 신발을 벗고 올라선 마루에서 나무 바닥 특유의 질감과 소리가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2020년 2월 개관한 이곳에서는 첫 번째 전시 <관사아트 2020 : 공존>이 진행 중인데, 대전지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참여한 전시회라고 한다. 최근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뉴트로의 바람을 타고 소제동 역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재생공간으로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데, 그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고 한다. 과거의 건물 속에 펼쳐지는 최첨단의 가상세계는 소제동의 골목과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새롭게 문을 연 ‘관사 16호’ 외에도 소제동에는 매력적인 문화 공간들이 존재한다. 옛 철도관사 45호에는 ‘소제창작촌’ 이 자리 잡고 있다. 레지던시 공간으로 매년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작업을 이어가고, 또 지역주민과 소통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빈 관사 공간을 이용해 전시를 열기도 하고, 때로는 축제를 개최하면서 소제동에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시 전시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번 여행에서도 소제창작촌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문 앞에 놓여 있는 허름한 의자 한 개는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느라 지친 걸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낮보다 밤이 더 역동적인 마을

대동천을 따라 늘어선 건물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낮에는 화사한 벽화들이 마을을 밝히고, 밤에는 골목 곳곳에 새롭게 들어선 공간들이 불빛을 밝힌다. 그래서 소제동의 밤은 낮보다 더 역동적이다. 낡은 관사 건물을 활용해 각자의 개성을 담은 ‘힙한’ 카페들이 일제히 불을 밝힌다. 일과를 마치고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을 찾은 연인, 또는 친구들이 골목을 채우기 시작한다. SNS에서 가장 ‘힙한’ 동네답게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대전역과 인접해있다 보니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어차면서 적막했던 옛 골목은 생기를 되찾는다. 쓸쓸했던 골목이 레트로 감성을 입고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70년이 넘은 여관방을 개조한 카페, 마을 한복판에 있던 대나무숲을 그대로 끌어안은 카페,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의 콘셉트를 가져온 이국적인 풍경의 레스토랑 등 골목 구석구석 매력적인 가게들이 가득하다. 지역의 식재료로 만든 재미있는 이름의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있고, 일본온천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식당도 있다. 골목을 누비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가게를 찾아가는 것도 소제동을 여행하는 또 다른 재미가 된다. 빈집과 폐허 사이사이 위치한 가게들은 밤하늘에 점점이 흩뿌려진 별처럼 저마다 빛을 밝히며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 간다.

소제동을 한눈에 담다

든든히 배를 채웠다면, 조금 더 멀리까지 가보기로 한다. 대전의 원도심에 위치한 소제동 인근에는 매력적인 동네가 많이 있다. 대흥동 역시 근대문화유산과 매력적인 카페들이 모여있어 거닐기에 좋은 곳이다. 소제동과 바로 맞닿아 있는 대동은 벽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어, 골목을 따라 걷다 마음에 드는 벽화 앞에 멈춰 사진을 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마을 꼭대기에 있는 대동하늘공원에 오르면 대전시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대전시의 야경을 보러 대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차를 타고 오르기 쉽지 않은 골목이라 두 발로 직접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숨이 턱턱 막힐 때쯤 모습을 드러내는 알록달록한 풍차와 탁 트인 전경은 그 모든 수고를 잊게 만든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건물들과 그 사이사이 나 있는 골목.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환하게 불을 밝히는 서울의 야경과는 또 다른 모습에서 따스함이 묻어나는 기분이다.
이제 골목은 사라져 가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낮은 담벼락과 넓은 마당, 소담한 지붕을 얹은 집들은 고층 아파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개발이 시작된 소제동 역시 언젠가는 지금의 모습을 모두 잃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비록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어쩌면 그 풍경이야 말로 소제동이 품은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시간의 속도를 늦춰 다시 골목을 걸어보자. 과거와 현재가 층층이 겹쳐진 새로운 소제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