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절이 아름다운 선운산

고창 여행의 시작은 선운산으로 잡았다. 봄에는 동백, 여름에는 계곡, 가을에는 단풍과 꽃무릇으로 단장해 어느 계절도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다. 겨울의 설경 역시 빠지지 않는 절경이다. 산에는 기암괴석들도 가득해 호남의 내금강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선운산의 사계 중에 가을을 선택한 이유는 꽃무릇 때문이다. 잎과 꽃이 엇갈려 자라는 탓에 ‘상사화’라고도 불린다는데, 그래서 꽃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다. 가을 산길을 붉게 메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낭만이 물씬 느껴진다.
선운산에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 년 고찰 선운사(禪雲寺)가 있다. 선운사가 창건됐을 당시만 해도 89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도솔암, 창담암, 동운암, 석상암만 남아 있다. 원래는 선운산의 이름도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뜻의 도솔산인데,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선운산은 크게 4가지 코스로 등반할 수 있다. 선운사와 도솔암, 낙조대와 천마봉을 돌아보는 3시간짜리 코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거리는 짧지만, 선운산이 지닌 매력은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산군의 능선을 모두 밟고 돌아오는 10시간짜리 코스는 등산 애호가들에게 인기만점이다.

문인이 사랑한 풍경

가을을 즐기려고 나선 길, 숲길을 따라 선운사까지 걷기로 한다.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가을의 색을, 소리를 마음에 담는다. 관광안내소에서 선운사까지 이어진 약 800m의 길은 무수한 문인이 걸었던 길이다. 미당 서정주와 소설가 정찬주, 그리고 세시봉으로 유명한 송창식까지 선운사를 노래했다. 봄날 동백을 보러 이곳에 걸음을 했던 서정주는 때가 일러 꽃구경은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선운사 입구에는 그날의 아쉬움을 담은 서정주의 작품 ‘선운사 동구’ 시비가 있다. 송창식도 ‘선운사’에서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라고 노래했을 정도니 봄날의 동백도 무척 궁금해진다.
시비를 지나자 선운사 일주문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문 현판에 적힌 ‘도솔산 선운사’는 일중 김충현의 글씨인데, 부안 내소사의 현판 역시 그의 글씨다. 그곳에서 몇 분 걷지 않아 만날 수 있는 부도전.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가 글을 짓고 쓴 백파율사비가 있다. 선운사에서 불법을 닦았던 고승 백파 선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추사 만년 글씨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부도전에 있는 비석은 복제품이다. 비록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는 진품보다 그 크기는 조금 작지만, 추사의 글씨를 감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선운사 만세루는 최근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이 됐다. 현존하는 가장 큰 사찰 누각인데다가 한 건물 안에서 두 가지 장식으로 보를 거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자재 구하기의 어려움을 극복한 건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때 중층 누각으로 지어졌지만 불타 없어졌다가 영조 때 단층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만세루 내부 대들보는 시원스레 뻗은 건물 외경과 달리 제멋대로 굽고 휘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법당은 곧고 바르게 잘 자란 나무로만 만든다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준다.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구부러진 나무들도 저마다의 쓸모를 찾아 사용되고 있다.

책과 함께하는 특별한 하루

책마을해리는 선운사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3천 평 규모에 달하는 이곳은 정말 표현 그대로 책‘마을’이다. 책 전시관, 활자 공방, 책 감옥 등 독특한 공간으로 가득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핫플레이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책을 테마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또 숙박공간까지 있어 북캉스를 즐길 수도 있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들어서자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책마을해리로 재탄생하기 전까지 폐교로 비어 있었다. 2001년까지는 나성초등학교로 운영되며 아이들이 뛰어놀며 공부하던 곳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학생 수가 줄어들자 문을 닫게 되었다. 서울에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했던 이대건 촌장은 이곳을 인수하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책마을해리로 변신시켰다. 버려진 채 방치되었던 공간은 아이들이 책을 읽고 뛰어노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책마을해리에 들어서면 예상보다 큰 규모에 놀라게 된다. 광활한 운동장과 세월의 손때가 남아 있는 듯한 붉은 벽돌 건물, 하얀 건물 모두 정겨운 시골 학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교문 바로 옆에는 북카페가 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노트, 엽서 등 책마을해리 기념품이 반겨준다. 책마을해리는 별도의 입장료가 없는 대신 책을 한 권 구매하면 입장할 수 있다. 시인학교, 만화학교, 출판캠프 등 책마을해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책이 100여 권에 달한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라는 모토처럼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나 작가이자 독자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만나게 된다.
북카페에서 잠시 여독을 풀었다면 본격적으로 책마을해리 탐방에 나선다. 제일 먼저 걸음을 옮긴 곳은 톰 소여의 모험이 생각나는 트리하우스. 커다란 나무 위에 지어진 ‘동학평화도서관’은 책마을해리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꾼 나만의 나무 위 작은 통나무집이 현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나무를 오르는 대신일까. 건물 아래로 이어진 클라이밍판도 이색적이다. 동학평화도서관이라는 이름에는 전북 고창과 정읍이 동학의 발원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 도서관 안에는 동학, 평화에 관련된 서적이 모여져 있다고 한다.
몸은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만큼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나무 사다리를 타고 동학평화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햇살, 방안을 가득 채운 나무 향기에 이곳에 배를 깔고 누어 책을 읽고, 때로는 낮잠도 들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어진다. 잠시나마 이 공간 안에서 만큼은 모험을 꿈꾸는 개구쟁이 시절로 돌아간다.

누구나 작가가 되는 마을

책감옥은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기로 맘먹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일단 한 번 들어가면 책 한 권을 다 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 감옥답게 문 바깥쪽으로 잠금장치가 있고, 심지어 문에는 식사를 넣어주는 배식구멍도 만들어져 있다. 꼭 한번 읽고 싶었던 책을 끝까지 읽기에 좋은 장소다. 침대와 작은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책꽂이. 간결하게 정리된 방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벽화다. 아쉽지만 책감옥에 갇혀 읽고 싶은 책의 목록만 머릿속에 정리해보며 걸음을 옮긴다.
‘책뜰’이라고 이름 붙여진 운동장을 지나 버들눈도서관에 간다. 책마을해리에서 제일 처음 만들어진 공간으로 창문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는 이층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모든 곳이 책으로 가득하다. MBC가 이전하면서 기증한 책들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버들눈도서관만큼 가득 책이 채워져 있는 공간이 또 있다. 바로 ‘책숲시간의숲’이다. 교실 두 개를 합쳐 만든 이곳에는 천장까지 책이 가득 채워져 있다. 무수히 많은 책장과 빈틈없이 꽂혀있는 책들.
이곳에는 예능프로그램 1박2일 출연자들이 만든 책장도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책마을갤러리’에는 책마을해리에서 발간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책마을해리에서 운영하는 책마을 학교를 통해 탄생한 김선순 할머니의 그림책이 시선을 끈다. 투박하게 그려진 그림과 간결하게 적힌 문장.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시골 아낙으로 살아온 할머니의 음성이 천천히 마음을 두드린다. 작은 공연이 열리는 바람언덕도,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한지활자 출판공방도 책마을해리에서는 빼놓지 않고 들려야 할 장소다. 구석구석 책마을해리의 매력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모자란 감이 있다.
떠밀리듯 흘려보낸 봄과 여름. 두 계절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맞이하는 가을만큼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게, 더욱 알차게 시작하고 싶다. 맘껏 책을 읽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책마을해리에는 마법의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