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탄생

유재석은 오랫동안 ‘국민 MC’의 영예를 이어왔고,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어왔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고 ‘유산슬’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었다. 실재와 재현을 오가는 두 인물은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전자의 위트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유려하게 꺾는 창법의 소유자인 유산슬은 누가 뭐래도 트로트 가수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요즘은 90년대로 회귀한 혼성 댄스 그룹 싹쓰리의 ‘유두래곤’으로 불린다. 가수 비와 배우 정지훈은 동일 인물이지만, 최근 불리는 이름은 ‘비룡’이다. 비는 애초부터 ‘멋짐 폭발’을 핵심으로 하는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그걸 내려놓은 그룹의 막내 비룡은 형과 누나 사이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또 다른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시대의 디바로 불렸던 이효리는 제주도에서 상경한 이후 모든 걸 내려놨다. 무서울 정도의 카리스마를 표출했던 그였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을 만나면 철부지 여동생에 다름없었다. 그 이미지를 싹쓰리의 홍일점 ‘린다G’에 불어넣었다. 개그우먼 김신영은 주체할 수 없는 끼로 대중을 웃겨왔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둘째이모 김다비’다. 노래와 춤에도 일가견 있던 김신영의 완전히 새로운 이면을 들추어낸 것이다.
대중이 익히 인지하고 있던 연예인의 또 다른 얼굴을 흔히들 ‘부캐’라 명시한다. 그가 아닌 또 다른 그,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는 용어다. 이 말은 게임에서 사용되어 오던 것이다. 본인의 아이디로 만든 캐릭터 이외에 별도의 용도 또는 대안적 이용을 위해 만든 ‘부캐릭터’. 밀레니얼과 밀레니얼 Z세대의 줄임말 혹은 신조어 트렌드에 따라 ‘부캐’로 줄여졌고, 연예인뿐만 아닌 스스로 창조한 또 다른 나를 지칭하게 되었다. 작금은 부캐의 시대다. 아니 모두가 부캐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인데?’라고 반박하겠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쉬이 깨달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SNS 계정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피드에 올리는 콘텐츠가 현실의 나인가, 아니면 현실 위에 판타지를 덧씌운 또 다른 나인가? 이에 대한 답변에 큰 주저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분명 실재와 차이를 지닌 나와 당신일 테니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부여된 나 아닌 또 다른 나로서의 이미지(혹은 이걸 환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이제 트렌드이면서 꽤 심오한 인문학적 관점의 사유를 요하는 흥미로운 소재가 되었다.

물론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문화적으로 대입되었을 때 어떤 감독의 세계를 대신 연기하는 배우로 지칭될 수도 있다. 같은 의미다. 개인이 가면을 쓰고 사회에 편입 되어 살아가는 것과 배우가 감독의 세계관을 대신 표출하는 건 동일한 사회·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존재론적 차원의 나로서 역사를 관통해 온 ‘나’와 ‘가면을 쓴 나’는 교집합을 생성하며 본연의 주체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인간은 이제 여러 개의 가면을 쓴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를 맞았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 트렌드 용어를 논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멀티 페르소나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한 이들을 지칭하는 밀레니얼 Z 세대에 이르면 인격적 다양함은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대는 자존감이 무척이나 강하다. 동시에 나와 당신이 다르다는 차이의 인식을 필연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는 ‘취존(취향존중)’이라는 그들의 용어에서 명확해진다. 또한 이들은 직접적으로 타자와 접촉하기보다는 온라인상에서의 가벼운 관계를 추구하는 편이다. 쉽게 말해 현실 친구보다는 ‘인친’이라 불리는 가상 세계의 친구를 더 선호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살짝 누그러뜨릴 필요도 있고, 때로는 나 아닌 나로서 보여지는 행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여기에서 멀티 페르소나가 부각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마감이라는 순간 앞에 굴복하고 있다. 하지만 방금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간 나는 어제 구입한 한정판 운동화를 자랑했고, 무려 25: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90년대 힙합 듀오 듀스의 바이닐 앨범 언박싱 영상을 업로드했다. 그 피드들에는 ‘부러워요’ 등의 시기와 질투 어린 댓글들이 달린다. 회사원으로서 조직에 얽매인 나는 상사 앞에서 내가 아닌 고분고분한 후배 역할을 하고 있다. 간부라는 직함을 가졌기에 후배들 앞에선 또 다른 나로서 리더십과 온화함을 동시에 보유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이미 나에겐 몇 개의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일인 다역을 소화하며 시대에 부합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연예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과 소통해야만 하는 그들의 직업 특성상 단일 캐릭터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유재석마저도 <무한도전>이 종영된 후 주춤했다. <놀면 뭐하니?> 속에서 유산슬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비는 또 어떤가! ‘깡’이라는 건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밈’(온라인에서 떠도는 짤방 혹은 패러 디 물 ) 으로희화화된 부가적 산물이었다. 그걸 김태호 PD가 주류화시켰다. 그렇게 비룡이라는 부캐가 탄생했다. 이효리도 그렇다. 과거의 이효리 이미지가 지속되었을 뿐, 가수로서의 그녀는 막다른 길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비룡과 린다G는 Z 세대에게 강렬한 한방을 날렸고, 비로서 비와 이효리는 부캐를 통해 본연의 자신을 다시 찾았다. 몇몇 부캐의 화려한 성공이 잇따르자 많은 연예인들은 지금 자신만의 부캐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조금 저급한 표현이지만 ‘물들어올 때노 젓는다’라고 했다. 주체가 지는 해였다면, 부캐를 통해 다시금 여명을 되찾으려 한다는 말이다.

상업적 목표를 가진 창조물

멀티 페르소나 중 부캐가 흥미로운 건 기존 인문학 이론에 반해 주체성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끄 라깡의 욕망 이론, 구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 등은 대부분 ‘호명’이라 일컫는 부름에 의해 주체가 담론화 또는 이데올로기화된다고 했었다. ‘꿈꾸는 당신 떠나라’라는 과거의 광고 문구에서 불려진 ‘당신’은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지칭하는 것처럼 느꼈었다. 마치 내가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은 인식론적 혼란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부캐는 조금 다르다. 주체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널리 알린다. 남이 불러줘서 비룡과 린다G가 된 게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작명하여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홍보한 것이다. SNS 상에서 내가 또 다른 나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현대 철학의 관점과 조금 상이하게 전개되는 최근 부캐의 양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부캐의 탄생은 어쩌면 또 다른 철학자 자끄 데리다적 해체에 의해 구조된 포스트 모더니즘적 전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설하고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들의 부캐를 만 들기 위해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가 전하는 쾌락과 불쾌는 동전의 앞뒤처럼 양가성을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예인이 고심 끝에 스스로 창조한 캐릭터 일지라도 누군가 다시금 불러줘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법칙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시청자라 불리는 대중들이 무조건적으로 연예인들의 부캐에 호응하는 건 아니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잘 짜여진 기획 내에서의 부캐는 막강한 인기를 구가하며 그의 본캐(릭터)에도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자칫 잘못 만들어진 부캐는 본캐를 망칠 수도 있다. 밀레니얼 Z 세대가 문화 및 라이프스타일 전반적 영역에서 주도권을 가진 시대에 그들의 트렌드에 부합하는 부캐로 접근해야 한다. 싹쓰리의 부캐들은 1990년대 뉴트로 트렌드와 완벽히 부합하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김신영의 부캐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 트렌드와 맞물렸다. 하지만 부캐의 인기는 영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 엔터테인먼트 신에서의 부캐 열풍은 상업적으로 명확한 목표를 가진 창조물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멀티 페르소나(여기서 말하는 다중인격은 정신병리학적 질병이 아님을 명확히 밝히는 바다)로 대변되는 세대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은 앞으로도 더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부캐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적 부캐, 비즈니스적 부캐 등이 우리 곁을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수용자로서의 우리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부캐들을 즐기면 그뿐이다. 모든 건 선택하는 이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