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을 만나다

다시 거리로 나와 세월을 머금고 여전히 문을 여는 가게들을 스쳐 지나간다. 사람의 발걸음이 끊겼던 곳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대로 있어 줘서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낡고 오래된 것이 가진 경쟁력으로 개항로가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함께 뛰는 가슴으로 찾은 곳은 답동 성당이다. 인근의 근대식 공원, 호텔, 은행 하다못해 이곳의 시외전화, 구두, 성냥 등 이 모든 것에 ‘우리나라 최초, 인천 최초’라는 수식어를 그저 갖다 붙여도 그게 사실일 확률이 높은 가운데, 답동 성당 역시 그러하다.
1897년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세워진 답동 성당은 인천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으로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이 조화를 이룬 근대 건축물이다. 성당은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과 함께 개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함께 겪어냈고, 여전히 개항로 근처 신앙인들의 안식처가 돼주고 있다. 언덕 위에 높이 솟은 건축물 첨탑 위에 느긋한 고요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겪어 왔던 많은 일,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시 잠재워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의연히 겪어내면 또 다른 날을 만날 거라 위로하는 듯했다. 그렇게 숨 한번 고르고 다시 언덕을 지난다.
세상사를 초연해 고고한 신앙을 빚는 성당을 지나 만난 곳은 재밌게도 애관 극장이다. 뭐니 뭐니 해도 다양한 세상사가 사람 사는 맛을 알게 하는 법. 대중문화의 보고인 극장과 마주하니 있을 것 다 있는 개항로의 구성이 참 흥미롭게 느껴졌다. 언뜻 촌스러워 보이는 컬러와 모양의 이 건물 앞에 서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외관은 그럴지언정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애관극장의 역사는 청일전쟁(1894~1895)이 한참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단층 창고를 공연극장으로 전용해 협률사(協律舍)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26년 ‘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소실된 뒤 196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애관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고, 한때 경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민들이 합심하고 서명해 지켜온 건물이기도 하다. 내부는 꽤 잘 꾸며놓았으며 여전히 최근 영화를 상영하며 성행 중이다.
다음 발걸음을 옮긴 곳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신포 국제시장이다. 이곳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시장으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신포 닭강정, 신포 만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메뉴들인 만큼 이 시장에 뿌리를 둔 역사가 깊은 가게부터 근래에 입점한 듯 산뜻한 가게까지 다양한 점포들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자꾸 멈추게 만든다.

과거를 들추어 보다

신포 국제시장을 지나 개항로의 마지막 코스에 다다랐다. 깔끔한 벽돌에 흰색으로 꾸며 놓은 문이 잘 어우러지는 건물, 빈티지한 조명들마저 인테리어를 세심하게 완성한다는 느낌이 드는 이곳은 대불호텔 전시관이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있던 곳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대불호텔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고, 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해 1887년경 한 일본인이 세운 호텔이었다. 침대가 딸린 객실이 11개, 다다미가 240개나 있었다는 이 호텔은 영어로 손님을 맞고, 서양식 음식을 서비스했다. 커피가 최초로 보급된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개항기 키가 작은 집들 사이에 들어선 3층 건물은 존재만으로도 독보적인 느낌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대불호텔은 경인선 개통 등 여러 변화를 겪어내며 이렇게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전시관 1층에 들어서니 어린 시절 집에서 보았던 괘종시계가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과거를 엿보게 만드는 시간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1전시실에선 호텔 터를 볼 수 있었고, 2전시실에는 영업 당시 객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어 흥미를 끌었다. 개화기 당시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3전시실은 연회실을 재현했는데, 이곳에서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연회장 한쪽 스크린에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이 흘러나오듯, 실제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호텔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은 이곳을 서울로 가기 위한 통과점처럼 여겼다. 현재도 인천을 서울과 가까운 도시쯤으로 붙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개항로를 돌아보며 느낀 건 이곳이 동북아시아가 격동의 세월을 보낸 1900년 초반, 그 역사의 중심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제 개항로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젊은 사람들이 거리를 누빈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개항로를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소문이 인천 사람들뿐 아니라 외지인들에게도 심상치 않게 번지고 있다.
대불호텔 전시실을 나오니 해가 짧아진 겨울이 실감 날 만큼 제법 날이 기울었다. 얼른 차에 올랐다. 내내 개항을 생각했더니 바다가 고팠다. 가까운 소래포구를 찍고 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포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어김없이 다음날 또다시 해가 떠오른다. 문득 그 사실이 고마웠다. 개항로가 살아난 것만큼이나.